삶이 주는 허무함, 까만 하늘과 대조되는 설원의 콘트라스트.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설국]이 주는 공감각적 심상은,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한 편의 시를 읽어내려가는 것 같다. 행간의 여백은 줄거리보다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으며, 예민한 문장은 섬세하기 그지없다. 눈밭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사뿐 따라가지 않으면 감정선을 놓쳐 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雪國) 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스키장과 온천이 유명한 니가타 현의 설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마무라는 환자를 돌보는 요코라는 여성을 발견한다.
여기서 '처녀'라고 하는 것은 시마무라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동행하는 남자가 그녀의 무엇이 되는지 시마무라는 알 턱이 없었다.
시마무라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어떤 말 못 할 '비현실적인 힘'에 이끌린다. 요코가 맘에 든 시마무라는 그녀를 제멋대로 상상한다. 그리고 동시에 또 한 명의 여자를 떠올린다.
흐려져가는 무력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촉감으로 지금도 젖어 있어, 자기를 멀리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이상스레 생각하면서 코에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고하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뚜렷이 떠올랐다. ...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마음을 먼 곳에 두고 있었던 탓이고,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맞은편 좌석의 여자 얼굴이 비친 것이었다. 바깥은 어둠이 내리 깔리고, 기차 안은 불이 켜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은 거울이 된다.
작은 눈동자의 언저리를 환히 밝히면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친 순간, 그녀의 눈은 어두운 물결 위에 떠 있는 요염한 야광충(夜光蟲) 이었다.
그때의 시마무라는 무위도식하는 룸펜이었다. 그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진실성마저 잃지 않겠다며 니가타 현의 설산을 등산하고 돌아온다. 온천장에 내려온 그는 곧 기생을 불러 찾는다. 기생 대신에 한 청초한 하녀가 대신 들어오게 되는데 그녀가 샤미센과 춤 선생 댁에 의탁하고 있는 고마코이다.
가늘고 높은 코는 약간 빈약해 보이지만 볼이 생생하게 상기되어 있어,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저 아름답고 색갈이 선명한 입술은 조그맣게 오므렸을 때에도 거기 비치는 빛을 반들반들 움직이게 하는 듯, 그러면서도 노래에 따라 크게 벌렸다가 또 가련하게 곧 오므라지곤 하여, 그녀 육체의 매력 그대로였다. 약간 처진 듯한 눈썹 아래에는 눈꼬리가 올라가지도 처지지도 않고, 일부러 직선으로 그은 듯한 눈은 지금은 촉촉하게 빛나 앳되게 보였다. 화장기 없는, 도회지의 물 장수로 트인 데다 산의 정기에 물들었다고나 할, 백합 아니 양파의 구근을 벗겨 놓은 듯한 생생한 피부는 목덜미까지 불그레 혈색이 피어올라 무엇보다도 청결했다.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에 전에 없이 처녀티가 났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녀가 '결국 기생이 되었다'라는 것을 안 시마무라는, 그녀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실망한다. 사실 그녀는 스승의 자녀 유키오의 요양비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중이다. 유키오는 요코가 기차 안에서 돌보고 있던 남자로, 후에 이 사실을 안 시마무라는 그녀에게 다시 설렌다. 그녀는 연정을 품은 시마무라에게 매달리느라 유키오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는, 예전처럼 순수한 여인일 따름이다.
“이런 날은 소리가 달라요.”
자신도 모르게 늘 산골짜기의 드넓은 자연을 상대로 고독하게 연습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던 탓에, 발목 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고독은 애수를 짓밟고 야성의 의지력을 품고 있었다. 다소 소질은 있다 하더라도 복잡한 곡을 악보로 독학해서 악보를 보지 않고서도 자유자재로 켤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강한 의지로 노력을 거듭했음에 틀림없다.
시마무라에겐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워도 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그녀는 비록 기생이 되었으며, 십 대의 앳된 순수함으로부터 졸업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오염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당돌하게 지켜나가는 인물이다.
시마무라는 희고 살이 찐 인물로, 도쿄에 아내와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두 순수한 여인을 애심에 찬 시선으로 관찰한다.
목덜미엔 작년보다 살이 져 기름살이 낀 것 같았다. '스물하나가 되었구나'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시마무라는 일본 춤에 관심이 높아 관련 연구에까지 참여한다. 그러나 막상 일본 춤의 소장파들로부터 심도 있는 참여를 권유받게 되자, '실제 운동 속으로 투신할 수밖에 없다'라는 기분에 휩쓸리면서, 별안간 서양 무용으로 관심을 돌려버린다. 그 후로 그는 서양 무용의 책과 사진을 열심히 수집하고 포스터나 프로그램 등을 들여오지만, 실제로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쇄물에만 의지하여 글을 쓰는 무위도식의 삶을 즐긴다. 한량인 시마무라는 그렇게 허무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대상에 관심을 갖지만 절대로 직접 개입하지 않는 그는, 고요한 관찰자이며 소극적인 은둔자이다.
적은 부수의 호화 본으로 자비 출판할 셈이었다. 지금의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책이라는 점이 도리어 그를 안심시킨다고 할 수 있었다. 자기의 일로써 스스로를 냉소하는 것이 달콤한 즐거움인 모양이었다.
검정의 반의어는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색채의 대비가 극에 달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요코의 죽음이 불꽃처럼 피어난다.
요코는 시마무라나 고마코보다 적게 등장한다. 길가 양지에 짚 멍석을 펴고 팥 타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나, 고마코에게 샤미센을 타 넘어가는 등 간간히만 등장하는 모습이다. 고마코가 불꽃처럼 뜨겁고 열정적인 순수함을 보여준다면, 맑고 구슬픈 목소리를 가진 요코는 설국의 눈처럼 어딘지 처연하고, 순수하며 차갑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웠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코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자기 전에 탕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면서?"
"어마, 실례의 말씀, 싫어요."
그 목소리가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자네에 대해선 뭐든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
요코가 죽는다. 화제 속에서 펑 하고 튀어 오르는 모습은 슬로 모션을 보듯 꽤나 세세히 묘사된다. 마치 시마무라가 죽은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라고 했던 것처럼, 그녀의 죽음은 비현실적이며 아름답다. 저항하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거기에 풀썩 여자의 몸이 떠올랐다. 그런 식의 추락이었다. 여자의 몸은 공중에서 수평이었다. 시마무라는 섬뜩했지만 순간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돼 있던 몸이 공중에 내던져져 유연해졌지만, 그러나 인형 같은 무저항, 목숨이 없는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칠흑 같은 시마무라와 눈처럼 순수한 두 여인이 대비를 이룬다. 불꽃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고마코와 불길에 타버려 설원으로 튀어 오르는 하얀 요코가 대비를 이룬다.
일렁이는 불길에 비친 고마코의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시작된 온기는, 그녀의 손을 거쳐 시마무라의 손까지 따뜻하게 전해진다. 그러자 되려 시마무라는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꿈속 같은 설국의 나라에서 피아는 경계를 잃고 감정은 이해의 영역 바깥에 있다. 눈 덮인 대지가 오히려 캄캄한 하늘을 비추는 것처럼 아이러니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조그만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가누고 바로 서면서 눈을 치켜뜬 순간,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은하수가 시마무라 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인간문제 | 강경애 (0) | 2022.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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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 | 가와바타 야스나리 (0) | 202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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